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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온의 서고

[역사를 바꾼 인물 또는 사건] 왜구 6 : 공민왕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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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은 북벌을 시작한 해이다.

1월 이성계가 압록강을 넘어 신기의 활솜씨를 뽐내며 옛 졸본인 오녀산성을 함락시켰다.

북벌은 고려의 오랜 꿈이자 심양왕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회심의 카드였다.

하지만 당시 요동은 나하추를 비롯한 원의 군벌들, 명의 세력등이 엉켜있는 아주 복잡한 상태였다.

이 난장판에 한 발 걸치려했던 고려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역시나 왜구였다.

1월에 원정군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왜구가 2월에 내포에 침입하여 병선 30여 척을 파괴하고 여러 주의 조세를 모조리 약탈한 것이다.

왜구... 공민왕을 괴롭혀도 너무 괴롭혔다.

왜구한테 발목이 잡혀서 그랬는지 아니면 눈치를 보느라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고려가 꾸물거리는 사이 기철의 아들내미가 애비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요동성에서 원의 유민을 끌어모아 고려를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공민왕은 10월 기샤인테무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원정군을 파견한다.

 

도통사 이인임, 동북면도원수 이성계, 서북면도원수 지용수, 서북면 부원수 양백안, 안주상만호 임견미가 이끄는 군대가 요동으로 향해, 압록강 도하를 마친 것이 11월 2일이었다.

공민왕의 꿈이자 고려의 바람인 요동탈환이 시작된 것이다.

압록강 도강후 고려군은 하루 100리 행군이라는 경이적인 속도로 진군하여

반나절 간의 치열한 접전끝에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1370년 11월 4일, 발해가 멸망한지 445년만이었다.

고려가 400년 동안 노래를 부르던 다물을 마침내 달성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성을 점령하면서 식량창고를 홀랑 태워먹는 바람에 군량부족으로 철수하고마는 어이 없는 일이 발생하였다.

참나.... 공민왕....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이후 요동성은 우리민족과 더이상 연을 맺지 않았다.

 

공민왕이 기가 막히던 말던 왜구는 1371년에도 극성을 부렸다.

3월에는 황해남도 해주를 공격하여 관아에 불을 지른 후 해주 목사의 부인과 딸을 납치했고

7월에는 예성강으로 진입하여 고려 전함 40여척을 불태는 사건이 벌어졌다.

공민왕은 이에 열받아 병마사 김입견을 장형에 처한 후 유배를 보내 버렸다.

내친김에 시건방을 떨던 재수없는 신돈도 죽여버리고 공민왕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였다.

8월에는 왜구가 봉주를 공격하자. 공민왕은 동강도지휘사으로 양백연을, 서강도지휘사로 이성계를 임명했다.

이성계가 본격적으로 왜구와의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1372년 2월에는 왜구가 황해도 백주를 공격했으며,

3월에는 순천, 장흥과 현재의 강진군, 영암군 등을 공격하며 전라도 지역을 뒤집어 놓았다.

4월에는 원산에 설치해놓았던 조창인 진명창이 약탈 당했으며,

6월에는 강릉, 영덕, 덕원이 왜구에 당하고 말았다.

안변과 함주 역시 공격 당했는데 안변부사 장백안은 제대로 수비하지 못해 곤장 87대를 맡기도 했다.

함주와 북청주에서는 만호 조인벽이 매복으로 왜구 70여명을 죽였다.

홍주를 침공하는 6월 달에는 무려 5번의 왜구 침공이 있었다.

7월에는 왜구가 양광도를 쳐들어 왔으며,

9월에는 양광도 순문사 조천보가 용성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10월 왜구가 양천을 공격해 오자 고려군은 이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으나

수전에 익숙치 못했던 고려군은 이작도에 이어 또다시 대패했다.

이에 공민왕은 즉시 5군을 이끌고 승천부로 향했으며,

인월곶으로 가면서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놈들이나 교량등의 보수를 제대로 하지 않은 놈들을 모두 엄벌에 처했고

수군 사열을 실시하여 호위태세가 느슨한 제조관들을 장형에 처했다.

왕은 수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정지를 전라도 안무사로 임명하여 해군을 양성하게 하였다.

 

1373 2월에는 정말 오랫만에 고려군의 시원한 승전 소식이 들려왔다.

왜구가 구산현의 삼일포로 대거 몰려오자, 경상도 도순문사였던 홍사우가 군사를 끌고 가서 왜구를 대파 시킨 것이다.

2백이나 되는 왜구의 목을 베었고, 물에 빠져 죽은 왜구가 무려 1,000명이 넘었으며, 노획한 무기가 셀 수조차 없었다.

졸전만을 거듭하던 당시 고려군으로서는 상당한 대승을 거둔 것으로

홍사우는 본래부터 청렴하고 강직하여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하는데...

홍사우의 아들이 그 유명한 패륜아 홍륜이었다.

이 홍륜이가 다음해에 공민왕을 시해하여 집안이 결딴 나면서 또 다른 아들 홍이와 함께 유배되었다가 처형 되었다.

 

3월 경 왜구는 하동군을 공격했다.

4월 경 왜구가 개경 근처의 섬까지 다가왔고  6월에 한양부까지 침입해 민가를 초토화 시켰다.

7월에는 왜구가 교동을 공격했으며,

8월에는 해주를 침입해 목사 엄익겸을 살해했다.

왜구를 막지 못한 벌로 이성림, 지심 등이 참형에 처해지고 도흥 등이 파직되기도 했다.

 

1374년, 3월에는 왜구가 안주로 쳐들어오자, 목사 박수경이 이를 물리쳤으나

경상도에선 함선 40여척이 박살났다.

4월 고려군은 왜구와 맞서 싸운 이래 최악의 타격을 입는다.

무려 350여척으로 침입한 왜구는 합포의 고려군 군영을 급습하여 병선을 불지르고 군영을 박살을 내었다.

이때 죽은 고려군의 숫자는 5,000명이 넘었다 한다.

이 당시 합포의 책임자는 전라도에서 왜구에게 박살나고도 뇌물과 사기로 모면한 김횡이었다.

김흥경, 김사행의 비호로 경상도 도순무사가 된 김횡은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전라도에 있을 때처럼 합포에서도 사리사욕을 채우며 못된 짓만 골라하고 있었다. 

이 정신 나간 놈때문에 5,000여명이 손도 못써보고 전사한 것이다.

그 당시 고려상황에서 5000명의 군사 손실은 엄청나게 큰 손실로 대 왜구 전선의 한 축이 무너진 꼴이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사태를 당한 공민왕은 바로 조림을 보내어 김횡을 쳐죽였고,

그 시체를 찢어 각 도에 조리돌림 하여 경고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런다고 5,000여명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열받았으면 그랬을까?

공민왕 말년의 난행을 이해할 법도 하다.

 

이 합포의 엄청난 패전 이후 평안북도의 목미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막던 서해도만호 이성과 부사 한방도, 최사정 등이 모두 전사했고

5월에는 왜구가 강릉, 경주, 울주, 삼척을 연이어 털며 기세를 올렸다.

6월에는 양주에서 전투가 벌어져 고려군이 왜구 백여명을 참살하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8월에는 회양이 공격 당했다.

9월에는 도성 근처까지 진군한 왜구 때문에 수도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졌으며, 안주가 공격 당했다.

그리고 공민왕이 살해되었다.

 

공민왕

모후가 고려인이라 왕등용 시험에서 두번이나 낙방을 하고 기황후의 후원으로 겨우겨우 왕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10년의 볼모살이 끝에 차지한 고려는 권문세족의 나라였고

왜구와 되놈의 침략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는 독이 든 사과였다.

그래도 그 와중에 고려의 자주권을 확립했고 요동을 정벌했으며 권문세족을 숙청하는 등

범상치 않은 능력을 보인 고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로맨스, 신돈의 과감한 기용, 말년의 난행과 그로인한 처참한 죽음..

45년이라는 길지않은 생애 동안 참으로 파란만장하게 살다 간 인물이었다.

글과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는 것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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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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