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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온의 서고

[역사를 바꾼 인물 또는 사건] 왜구 7 : 우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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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년 9월, 공민왕이 살해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신돈의 비첩 출신인 반야의 아들, 우왕이 10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귀족의 나라 고려에서 혈통을 의심받는 10살짜리 어린 왕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 리 없고....

우왕이 누구의 자식인지, 나이가 몇인지는 왜구야 알 바 없겠으나, 만만하게 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공민왕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횟수와 강도로 왜구들이 몰려온 것이다.

배 가진 왜놈들은 모조리 몰려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개떼처럼 몰려드는 왜구들...

일확천금을 노리고 신대륙으로 몰려가 인디언들을 학살하던 백인들...비교가 과했나?

 

우왕 즉위와 동시인 12월에  밀양이 공격 당해 다음해 1월까지 이어졌다.

3월에는 경양현이었고, 한방언이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고 말았다.

5월 경에는 등경광이란 왜구에게 공갈 협박을 당해 삥을 뜯겼고

8월에는 낙안에도 쳐들어왔다.

9월에는 왜구가 덕적도와 자연도 등지로 몰려와 개경이 위급하게 되어 급하게  이성계와 최영을 모두 파견해야 했는데

그 사이 천안, 서산, 홍성군 등이 약탈당하였다.

12월에는 양광도로 몰려왔고.

 

1376년 3월에는 진주로 온 왜구를 조민수가 막았고

6월에는 임주에서 병마사 유실, 지익주사 김밀 등이 20여척의 함선으로 침공한 왜구를 막았으나

고성현은 노략질을 당했다.

7월에는 왜구가 20여척의 함선으로 전라도 원수의 군영을 공격하고, 나주로 이동하며 고려군의 함선을 불태웠다.

이후 부여로 진군하면서, 만나는 고려군을 연파하며, 공주 논산을 거쳐 홍산으로 몰려들었다.

최영이 노구를 이끌고 출전하여 선봉에 서서 적을 때려잡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홍산 대첩이다.

그런데 전과는 유명세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던 모양으로 이후의 왜구의 공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9월에 고부군, 정읍시, 고창군, 김제군 지역이 연이어 공격당해 조운선 이동은 다시 불가능해졌고.

10월에는 왜구가 진포, 강화부를 침공하여 고려군의 병선을 불태웠다.

한주에서는 최공철이 왜구 100여명을 죽이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고

50여척의 왜구 함대가 쳐들어온 부령현에서는 1000여명이 넘는 왜구를 기습공격하여 때려잡기도 했다.

11월에는 경남 거제, 함안ㆍ동래ㆍ양주ㆍ언양ㆍ기장ㆍ고성ㆍ영성, 진주, 밀성이 공격 당했고

12월에는 합포의 고려군영이 공격 당했으며, 의창ㆍ회원ㆍ함안ㆍ진해ㆍ고성ㆍ반성ㆍ동평ㆍ동래ㆍ기장  등이 모두 노략질 당하고 백성들이 학살되었다.

 

1377년은 최악의 해였다.

1월, 왜구는 합포의 회원창을 공격하여 고려군의 군량까지 약탈했다.

2월에는 왜구가 신평현을 공격했는데, 홍인계가 막았으나. 이어진 평택현에서는 인해가  패하고 말았다.

3월에는 왜구가 착량을 공격해서 군함 50여척을 모두 불태워 고려군의 함선들이 불타는 빛 때문에 밤이 낮 같을 지경이었고  죽은 병사만 1,000여명을 넘었다. 

이때 지휘관인 손광유는 술처먹고 자고 있었다 한다.

이 왜구들은 강화도를 침공했는데 나세가 막아서자 진로를 수안현, 통진현, 동성현 등으로 바꾸고, 지나가는 모든 곳을 황폐화시켰다.

고려는 백성들에게는 지옥, 왜구에게는 낙원인 땅이었다.

4월에는  대마도에서 동남해의 바다를 뒤덮을 듯한 왜구의 대함대가 구름같이 몰려와 울주에 도달했다. 

황산강에서 박위가 소규모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영산에서는 전황이 좋지 못했고,  울주, 양주, 밀성 등은 모조리 불에 타고 말았다.

한편 강화도에서도 왜구의 군세가 움직여 서강 부근으로 이동했기에, 변안열과 최영이 이를 막아야 했다. 

양면 공격에 고려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고려 조정은 거의 한달만에야 간신히 우인열의 경상도군에게 지원병을 보내었는데 그 군대의 사령관은  이성계였다.

지리산 부근에서, 진군하던 왜구와 마주친 이성계는 까부는 왜구의 엉덩이를 화살로 날려버리는 신기의 활솜씨를 뽐내며 무지막지한 돌격작전으로 왜구들을 섬멸해버렸다.

이 승리에 고무되었는지 박위는 형산강에서 왜구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배극렴도 왜구들을 몰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화도 쪽에서는 고려군이 왜구들의 위장 전술에 농락을 당하며 연이은 패전을 하고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이놈들은 기병까지 끌고와서 양광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수원, 양성, 안성 부근의 고을들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양광도 전체가 털리고 있는 와중에 강화도에 다시 50여척의 왜구 함선이 나타나 부사 김인귀를 죽이고  고려 병사 천여명을 포로로 잡는 일이 발생하였다.

나세가 양백연과 함께 전함 50여척을 이끌고 나서 싸워 이들을 쫓아내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다시 왜구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살육과 약탈을 하는 등 강화도는 거의 왜구의 소굴이 되다시피했다.

6월, 신주, 옹진, 문화 등이 공격당했고 나세와 심덕부, 조인벽 등이 싸웠으나 패했다.

전라남도 역시 공격을 받았는데 정지가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으나 안주, 장택현은 속수무책이었다.

제주도는 무려 함선 2백여척의 왜구에 공격 당했고.

영강ㆍ장연ㆍ풍주ㆍ안악ㆍ함종ㆍ삼화ㆍ강서 역시 공격을 당했다.

 

7월 무렵이 되자 고려는 가뭄 때문에 국가 재정이 마비될 지경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왜구의 침공은 계속 이어져 풍주 등이 공격 당했다.

8월에는 왜구가 해주등 황해남도 지역을 공격했는데, 나세 등의 전황이 불리하여 이성계, 임견미, 유만수, 변안열 등이 파견되었다. 

이 싸움에서 임견미와 변안열은 초전에 패배하여 물러났는데, 이성계는 직접 대우전을 쏘며 싸움을 독려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9월에는 전라남도 영광, 전라북도 고창, 전라남도 함평군, 황해북도 지역, 경상남도 하동 등이 왜구에게 공격을 당했으며,

홍주로 온 왜구들은 목사 지득청의 처를 죽였다.왕안덕은 노현에서 왜구와 교전했으나 패배하였고.

10월에는 왜구가 40여척의 함선으로 하동군을 공격했으며, 

아산 부근으로 온 왜구는 왕안덕이 격퇴했다. 

익산 역시 왜구에 공격을 당했다.

11월에는 왜구가 부여ㆍ정산ㆍ홍산 등으로 쳐들어왔고, 

130여척의 왜선이 김해 등을 공격하자 배극렴이 나가서 싸웠으나 패전했다.

 김포시 부근등도 계속 공격을 당했다.

12월에는 순천에서 병마사 정지가 왜구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참으로 길고 긴 1377년이었다. 

이때 우왕의 나이 13살, 이 어린아이가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나 했을까?

 

왜구들은 1378년이 되자마자 황해남도 연안부를 공격했다.

2월에는 부평과  금주, 인천 지역 등이 공격을 당했고

3월에는 왜구가 다시 부평을 공격하고, 충청남도의 태안군을 공격했다. 

수원은 완전히  불에 타버렸고 충남 부여군과 서천군 등이 왜구에게 침략 당했다.

 

4월에는 충남 예산군, 덕풍현, 합덕현이 공격을 당했고 도순무사의 군영까지 불에 타 버렸다.

이 시기 대규모의 왜구가 다시 착량에 나타났고, 승천부에 모인 왜구들이 개경을 칠 것이라고 선언하자

최영은 양백연과 함께 당장 움직일 수 있는 고려의 전군을 해풍군에 배치했다. 

왜구들도 전력을 해풍에 밀집시켰고..

이 싸움에 최영의 말처럼 사직의 존망이 걸려버린 것이다.

최영은 양백연과 함께 왜구와 교전을 벌였으나, 집중 공격을 받은 최영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황이 점점 절망적으로 되어가서 우왕이 개경을 버리려할 때 이성계가 전장에 나타나서 아직 전장에 남아있던 양백연과 합세하여 왜구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정예 기병 집단에 왜구가 혼란에 빠진 사이 전장에서 이탈했던 최영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싸움터로 복귀했고 왜구의 측면을 유린했다. 

왜구는 이성계 - 양백연 - 최영의 삼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모조리 괴멸 되고 말았다.

 

5월에는 다시 나라에 가뭄이 들었으며, 용인, 수원, 서천군 등이 왜구에 공격을 당했고.

6월에는 왜구가 청주를 침략했는데, 그 기세가 대단해 고려군은...그냥 달아났다.

천안, 아산도  공격을 받았고 

수원, 평택에서는 최공철, 왕빈, 박수경이 막어내었다.

7월에도 아산에서 최공철, 왕빈, 박수경이 왜구를 몰아내었으며 

8월에는 경상도 원수 배극렴이  통영시 부근에서 왜구와 싸워 이겼고 

장흥에서는 지용기가 왜구와 소규모 교전을 치루었는데

현 서울 금천구와 강서구 부근에도 출몰했다.

9월에는 왜구가 서산시 부근에 나타났으며, 평안북도  철주,충남 논산 전라북도 익주, 전주가 공격 당했다.

 

10월에는 전남 옥주, 충남  진동, 회덕, 충북 청산, 충남  임주 등이 공격 당했고 전주는 완전히 왜구에 도륙났다.

영광, 광주 등지에서는 지용기와 정지가 왜구를 물리쳐 말 백여필을 노획하기도 했다.

11월에는 담양현에서 지용기와 정지가 왜구와 싸웠으며, 익주가 공격 당했다.

12월에는 하동과 진주가 공격 당하자 배극렴이 유익환과 함께 이를 막아내었고  정지가 전라도 순문사가 되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도 없이 몰려오는 왜구....정말 징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1379년 2월에는 정지가 순천, 조양, 영광 등지에서 왜구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3월에는 왜구가 도강현, 남원을 거쳐 다시 순천을 공격했다. 

4월에는  안산군,연안부가 공격 당하자 나세 등은 전함 52척을 이끌고 이를 막으러 가기도 했다. 

합포에서는 우인열이 싸워 막아내긴 했는데, 아군 사상자는 80여명이나 되는데 수급을 벤 적군은 4명 뿐이었다.

5월에는 보병 2천여명에 기병이 700명이나 되는 대규모 왜구가 진주를 침략하자, 양백연이 우인열, 배극렴 등과 함께 나서 이를 막아내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다른 왜구들이 풍천을 초토화시키면서  관아와 민가를 불사른 후 60여 명을 사로잡아갔다.

용강현 목곶포에서는 나세와 김유가 왜구와 수전을 벌였으며 신주가 공격 당했다. 

영청현에서는 최원지가 왜구와 싸워 이겼다.

울주와 계림부도 공격 당했는데  하을지가 돕지 않아 패배하였다.

6월에는 청도군을 공격한 왜구와 우인열이 맞서 싸웠고, 

용주와 의주의 침략은 장려가 물리쳤으며, 

울주ㆍ청도ㆍ밀성ㆍ자인ㆍ언양 등지의 공격은 우인열, 하을지, 배극렴이 막았다.

7월에는 왜구가 낙안군을 쳤고, 울릉도에서 왜구가 반 달간 머물다가 떠나기도 했다.

울주도 털렸고...

8월에는 왜구가 여미현을 쳤고, 이후 수주와 곽주를 공격했다. 

사주에서 우인열, 박수경, 배극렴, 오언이 왜구를 물리쳤다.

9월에는 단계ㆍ거창ㆍ야로 등이 공격을 받아 도순문사 김광부가 적과 싸우다 패배해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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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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