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인물 또는 사건] 왜구 8 : 우왕 2
본문
1380년은 우왕이 17살 나던 해이다.
이인임의 비호로 10살의 어린 나이에 왕좌라는 바늘 방석에 앉아 바들바들 떨기만 하던 우왕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이했는데...
불쌍한 어린아이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왜구들은 우왕이 사춘기라고 봐주지 않았다.
1월에는 잠잠했던 왜구들이 2월에는 경남 영선현, 전라도 보성과 순천을 공격했고
3월에는 순천의 사찰 송광사, 광주와 화순 등을 공격했는데 정지, 이원계, 오언 등이 막았다.
5월에는 왜구의 전함 백여척이 결성과 홍주로 쳐들어왔다
6월 7월에는 각각 정읍현 명량향등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는 지용기가 모두 격퇴했으나
서주를 침공한 왜구들은 부여현·정산현·운제현·고산현·유성현 등지를 유린한 후에
계룡산으로 몰려가 부녀자들을 학살하였고,김사혁이 막아서자 도망치면서도 계속해서 약탈을 했다.
이꼴을 본 우왕은 친정을 하겠다고 펼펄 뛰었으나 최영이 만류했다고 한다.
백성들의 고난에 분노하는 어린 왕..
사춘기 소년의 치기와 열정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뭐하나 자랑스럽거나 보람찰 일 없었고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그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그나마 그 인생의 위안거리는 되지 않았을까?
1380년 8월, 왜구와의 전쟁사에 분기점이 되는 사상 최대의 왜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동원된 왜구의 함선은 무려 500여척으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배가 500여척이면 타고 있는 놈들의 대가리는 2만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이 압도적인 왜구들이 충청남도 진포로 몰려든 것이다.
고려는 전국에서 닥닥 긁어모은 100여척의 배로 방어에 나섯으나 그간 보여준 고려수군의 전투력을 생각해 보면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려를 구한 이가 최무선이었다.
고려의 전투력을 경시했던 왜구들은 타고 있던 병력을 상륙시킨 후 배들을 묶어 놓았고
고려의 배들은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묶여있는 배들은 화포의 표적지 노릇을 하며 모조리 불타버렸다.
이전 30년 동안의 무력감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왜구와의 전쟁에서 한 획을 그은 이 싸움이 진포해전이다.
하지만 이 기념비적 승전은 위기의 시작일 뿐이었다.
왜구들의 주력은 이미 상륙해서 삼남지방을 약탈하고 있는 중이었고.
퇴로가 막힌 왜구들이 아예 내륙으로 진출하였기 때문이다.
이 놈들은 경남 사근내역에서 고려군을 박살내고 전북 남원방면으로 진출하였는데 그 세력이 강성하여 고려의 사직은 또한번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했다.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 고려는 가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전력을 전장에 투입한다
이 당시 고려의 군사력의 태반은 귀족들의 사병이므로 투입한 귀족의 숫자에 따라 전력이 달라지는 한심한 상황이었지만 이때의 위기는 심각해서 그랬는지 고려의 대응이 다른 때와 달랐다.
이때 투입한 원수의 숫자는 17명으로 사상 최대였고 당연히 군사의 숫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두목이 이렇게 많으면 될 일도 안되는 법이므로 당대 최강의 사병집단을 거느린 이성계를 3도 도순찰사로 삼아 지휘권을 단일화 한다.
지휘권이 단일화 되어서인지 아니면 이성계가 잘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고려군은 아지발도가 이끄는 엄청난 숫자의 왜구를 황산에서 혈전 끝에 섬멸하는데 성공한다.
이 전투가 황산대첩이며 왜구와의 전쟁사상 최대의 승리였다.
이 승리는 왜구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것으로 보이며 이후 전쟁 양상이 바뀌게 되는 전기가 되었다.
질풍노도의 소년왕은 승리의 소식을 듣고 춤을 췄겠지만 고려 종결자 이성계의 입지가 더욱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왕의 팔자야 어찌되었건 백성들 입장에서는 오랫만에 통쾌 상쾌한 일이었고 이성계는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황산대첩 이후의 왜구는 눈에 띠게 약해졌으며 동원되는 규모도 소규모에 머물렀다.
침입경로도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동해안에 집중되는 덕분에 조운선의 주요경로인 서남해안의 백성들은 한숨돌리게 되었으나 경상북도,강원도는 지옥이 되었다.
왜구는 황산대첩 이후 몇개월 정도 쥐죽은듯 있었는데....
굶어죽으나 맞아죽으나의 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해 2월 무렵부터 다시 준동하기 시작한다.
3월에는 강릉 , 송생ㆍ울진ㆍ삼척ㆍ평해ㆍ영해ㆍ영덕을 치더니 삼척군까지 불태웠다.
4월에는 황산대첩의 잔당을 토벌했고.
5월에는 이산수에서 오언이 왜구를 격퇴했고
6월에는 비인현, 영주가 불탔고, 50여척이라는 적지 않은 왜구가 김해를 공격하기도 했는데 원수 남질이 막아내었다.
울진현에서는 권현용이라는 장사가 왜구를 격퇴하였고.
7월에는 다시 김해,고성현 등이 공격을 당했으나 남질이 물리쳤다.
9월에는 남질이 지리산에서 왜구잔당을 토벌했고, 충남 서산과 경북 영천 등이 공격을 당했다.
10월에는 임하현, 나주 지역 등이 공격을 당했는데 이을진과 지용기가 이를 물리쳤다.
11월에는 보령현이 공격 당하고 밀성현도 공격을 당했는데 이흥부가 막았다.
1382년 2월 충남 ,부여·석성 등을 침공했고 평해군도 공격 당했다.
3월에는 삼척ㆍ울진ㆍ우계 등의 동해안으로 상륙한 왜구들이 영월ㆍ예안ㆍ영주ㆍ순흥ㆍ보주ㆍ안동 으로 진출하였고 죽령을 넘어서까지 공격 해 왔으나 변안열 등이 이를 격퇴했다.
양수척 무리 등 가왜들이 영월군을 침공하는 일도 있었다.
5월에는 영춘현과 회양부가 공격 당했다.
6월 무렵에는 경산.·대구·화원·계림, 통구현등 경상도 내륙으로 상당히 깊숙히 들어왔는데도
장수들이 싸우려고 하질 않고 교전을 회피하였다.
우왕은 조준을 보내 이를 닥달하게 했고, 조준은 이거인 등을 닥달해 왜구를 격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0월에는 황산대첩이 벌어졌던 남원에 왜구가 출현을 했으나 심우로가 물리쳤고, 50여척의 진포에 나타났으나 정지가 무찔렀는데 정지는 도망치는 왜선을 추격해서 군산까지 가 왜선 40여척을 얻기도 했다.
확실히 왜구는 약해졌고 고려의 방어력은 상승되었다.
고려는 더이상 왜구들의 불루오션이 아닌 것이다.
사양길에 접어든 왜구는 분위기 반전을 노렸는지 1383년다시 한번 거대한 전력을 일으킨다
1383년 5월 120여척의 대함대를 이끌고 경상도로 침공해 온 것이다.
비록 그 숫자가 이전처럼 가공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진포해전 이후 최대 규모의 군대이므로 충격과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이 120여척의 함선은 이전의 왜구 함선보다 더 큰 대선이었다.
고려의 신무기인 화포에 대항하기 위해 나름 개량한 모양이다.
합포원수 유만수는 위급함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했고
나주에 주둔 중이던 정지는 47척의 함선을 이끌고 밤낮으로 병사들을 독려해서 급하게 이동을 했다.
정지의 배의 숫자가 열세임을 안 왜구는 공격을 해왔고
정지는 왜구와 격렬한 사투를 벌여 적선 17척을 화포를 이용해 수장시켜버렸다.
정지가 "내가 왜구와 싸우기를 참 많이 싸웠는데, 살다살다 오늘처럼 통쾌하게 이긴적도 없었다."고 감탄 했을 정도의 대승이었다.
관음포 전투의 승리로 왜구의 서남해 침공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최무선과 화포... 민족을 구했다.
6월에는 고려 천민들인 가왜가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에서 횡행하다 소탕되는 일이 있었고
왜구가 길안ㆍ안강ㆍ기계ㆍ영주ㆍ신녕ㆍ장수ㆍ의흥ㆍ의성ㆍ선주 등을 공격하였는데
서남해안의 조운선을 털지못하게 되자 동해안으로 상륙해서 내륙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왜구들은 7월 경 대구 부근까지 진출하고,8월에는 비옥ㆍ의성 등지를 침략했는데
숫자가 꽤 많아 부원수 윤가관이 싸웠으나 패하기도 했다.
이어서 거령ㆍ장수를 공격하고 전주까지 공격하려던 왜구들은 황보림에게 패하였다.
8월에는 1000명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왜구가 춘양ㆍ영월ㆍ정선을 공격헀는데,
이놈들은 옥주ㆍ보령를 유린하고 계룡산으로 들어가는 상황이 있었으나 왕안덕 등이 격퇴하였다.
9월과 10월에는 강원도 전역이 유린되었다. 권현용 등이 소규모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384년의 왜구는 더 약해졌다.
2월 경 왜구는 진포에서 잡은 부녀자 중 25명을 돌려주었다.
7월에는 소규모의 왜구의 출몰이 있었고
12월에는 오랫만에 인천 앞바다 나타났는데 윤지철에게 패하고 포로 80여명을 반환했다.
도용하던 왜구는1385년 9월 경 겁도없이 이성계의 본거지인 함경남도 함주에 출몰했는데, 그 규모도 150여척 이나 되었다.
함주ㆍ홍원ㆍ북청ㆍ합란북 등이 유린되고 백성들이 학살되었으나 구국의 영웅 이성계에게 처참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1386년에는 조용했고
1387년은 정지가 대마도 원정을 건의하였다.
10월 무렵 왜구가 충남 지역을 공격했고, 12월에 전북 지역이 공격을 받았으나 왜구의 세력은 미미했다.
운명의 1388년 제2차 요동정벌이 단행된다.
명실상부한 청년왕이 된 우왕의 회심의 카드였으나 왜구들은 우왕의 발목을 끝까지 잡았다.
왜구에 대한 나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원정을 틈타 다시 준동한 왜구들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해서
양광도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며 여름에서 가을무렵에 이르기까지 기세를 떨쳤는데,
위화도 회군 이후, 원정군에서 돌아온 정지가 군사를 이끌고 이놈들을 격퇴했다.
이로서 25살 우왕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이성계의 천하가 문을 열었다.
-
[마루밑다락방의 서고] 초승에 뜨는 달은 ‘초승달’이 옳다. 물론 이 단어는 ‘초생(初生)’과 ‘달’이 합성한 경우이나, 어원에서 멀어져 굳어진 경우 관용에 따라 쓴다는 원칙에 따라, ‘초승달’이 올바른 표현이다. 마치 ‘폐렴(肺炎), 가난(艱難)’ 등과도 같은 경우이다.2015-05-25
-
[인문학] 아일랜드... 예이츠의 고향. 가장 늦게 도달한 기독교(카톨릭)에 가장 심취하였고 중세 수도원 운동이 크게 부흥하여 역으로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곳... 중국보다 성리학에 더 미쳤던 한국..자본주의의 실험재료가 되어, 자국의 식량이 부족하여 백성은 굶어죽는데도 영국으로 식량을 수출해야 했던 나라. 맬더스 인구론의 근거가 됐었고..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분단의 아픔을 격고 있는 나라.. 참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2015-04-16
-
[인문학] 러셀... 현대의 소크라테스...2015-04-15
-
[인문학] 비극적이고 치명적인 대가를 치른 후였다.-------------전이겠지요.2015-04-09
-
[인문학] 신영복 교수... 진정 겸손한 글을 쓰는 분이지요.소외 당한 자, 시대의 약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고. 그들을 대변 또는 위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작가들 중의 하나이지요.2015-04-08
-
[인문학] 좋군요....2015-04-07
-
[인문학] 과학이 본연의 임무대로 오류들을 이리저리 쳐내가다 보니 알맹이가 하나도 안 남은 형국이되었습니다. 그러니 과학 때문에 목적을 상실했다는 말이 나왔고, 도구에 불과한 과학이 미움을 받는 묘한 지경이 되었습니다만... 그게 과학의 잘못은 아니지요. 만들어진 요리가 맛이 없는게 잘드는 칼의 잘못입니까? 재료가 형편없었던 까닭이지요.2015-04-05
-
[인문학] 물론 ‘목적 없는 세계’라는 아이디어가 ‘신앙의 부재’와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회의를 주는 세계는 신앙심을 약화시키는 무신론을 철저히 방조하고 있음엔 틀림없는 것 같다. -------------음... 아직 옛날 습관이 남아있는 어투이군요...전지전능의 무한자는 인간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즉 불가지의 존재이지요. 이 불가지의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당연히 불가지입니다. 과학은 이 불가지의 세계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랫다가는 오컴에게 면도날로 난도질 당합니다. ㅋㅋㅋ2015-04-05
댓글목록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