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인물 또는 사건] 왜구 10 : 대마도
본문
대마도
일본말로 쓰시마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더 가까이에 있으며 부산에서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상당한 크기의 섬이다.
그러나 섬의 대부분이 산지여서 가용할 수 있는 토지가 많지 않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땅이다.
삼국시대에 왜인이 선점한 이래, 신라를 침범하는 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실성 마립간 시기, 풍도해전에서 왜가 박살나면서 전진기지의 역할이 끝났으며, 왜 본토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덕분에 일본 전국시대에 전란의 피해를 받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다.
땅을 욕심내는 국가가 없을 정도로 척박한 땅이니 만큼 항상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가 대마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일 양국이 안정되어 있는 시기에는 중계무역이나 조공 무역을 통해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할 때는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는 게 대마도의 사정이었으므로 왜구의 발생의 진원지 역할을 하였다.
기본적으로 세력이 약한 섬이므로 가해만 한 것이 아니라 피해도 많이 당했는데,
신라구에게 당한 것을 비롯해 이러 저러한 세력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대마도의 왜구가 극성을 부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었다.
원정 전까지 대마도는 고려에 대한 진봉무역으로 먹고 살았는데
여몽연합군은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간주하여 일차적으로 초토화시키는 바람에
엄청난 학살과 함께 얼마 되지 않은 농토가 거의 파괴되어 버렸다.
게다가 가해자인 고려는 원정 실패 후 사과는 고사하고 식량 수출을 중단하였고
설상 가상으로 다른 쪽 파트너인 일본 본토에서는 원정의 여파로 막부가 유명무실화되면서 남북조 혼란기가 열리게 되었다.
덕분에 대마도는 거의 아사직전이 되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정도면 누구라도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의 심정으로 배에 올라 해적질을 한 것이 고려 말 왜구 대 침략의 시작이다.
대마도의 성공에 자극을 받았는지 아니면 같은 심정이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지역의 왜구들도 고려로 몰려들었고, 나중에는 다이묘의 지원을 받는 거대 선단까지 몰려들게 되는,
노략질은 한반도의 반격을 불렀고,
왜구의 전진기지 역할을 해야 했던 대마도는 속죄양이 되었다.
대마도에 대한 1차 원정은 고려 창왕 1년 박위에 의해 이루어졌고.
조선 태조 5년 김사형에 의해 2차 원정이 이루어졌다.
왜구들은 한반도만 침략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도 괴롭혔는데,
명나라에서 왜구를 근절하기 위해 일본 원정의 움직임이 있자,
고려시대 여몽연합군 꼴이 날 것을 우려한 조선 태종은 3차 대마도 원정을 기획하였고,
세종 1년 이종무에 의해 3차원정이 이루어졌다.
이 3차원정은 기해동정이라도 하는데, 왜구를 섬멸하겠다는 목적 이외에 명에게 조선의 군사력과 왜구에 대한 대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종무는 병선 227척에 병사 1만 7천명을 거느리고 대마도에 상륙하여,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는 등 초전에는 승승장구하였으나
막판에 박실이 대마도주의 군대와 조우하여 350여명 사상이라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아마도 방심하였던 듯하나 대마도의 방어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장기전의 가능성과 태풍에 대한 염려로 13일 만에 이종무는 주력함대를 이끌고 거제도로 일단 철수했고,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는 항복하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후 왜구의 수는 이전에 비해 격감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조선의 물질적 양보 하에 왜와 조선간의 평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대마도주는 예조참의 급의 조선 왕의 신하이면서 동시에 막부의 다이묘라는 두 가지 신분을 지니게 되었고
대마도는 조일무역의 중개지가 되어 16세기까지 조선의 목면과 곡물 등을 수입하고 은, 동, 물소 뿔, 후추 등을 제공하면서 중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오닌의 난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가 무너지게 되자,
일본 상인들은 무역의 확장을 요구하며 중종5년 부산포, 내이포, 염포 등의 삼포에서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삼포왜란이라 부른다.
삼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고 외교는 단절되었으나
무역중단으로 곤란을 느낀 막부에서 직접 중개를 하여 2년 만에 관계를 회복하였는데 이것이 임신약조이다.
이후 소란이 일고, 무역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이에 대마도 인들이 다시 반발하는 상황이 30여차례 반복되었는데 이로 인해 비변사가 설치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정규군의 전면적 침략전쟁에서 선봉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막부의 압박으로 인해 울며 겨자 먹기로 참가한 것으로
쓰시마 영주의 입장에서 두 나라의 전쟁이 좋을 이유가 하나도 없으므로
전쟁을 막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기도 했는데
1590년에는 일본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대마도 영주가 선조에게 조총 몇 점을 진상하였으나
이미 화포 무기를 지닌 조선은 총통에 비해 위력이 약한 조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임란 이전에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 통신사가 바로 황윤길과 김성일의 통신사이다.
또 그 유명한 '명으로 가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入明)'라는 문구도 대마도주가 조작한 것으로,
원래 문구는 '명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안내하라(征明嚮導)'였다.
대마도주는 히데요시의 요구를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조작했지만 결과는 대동소이하였다.
역시나 임진왜란은 대마도에 대규모 식량부족 사태를 불렀다.
대마도주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점령할 경우 농사가 가능한 거제도를 받기로 했다고 하는데
일본이 소득없이 철수하자 아주 난감하게 되었다.
별 수 없이 조선에 무역재개를 청원하였지만 당연히 조선은 거부하였고 대마도 백성은 다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다.
대마도주는 조선에 애걸을 하는 한편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국교를 재개하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조선도 일본과의 국교 단절이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유정을 탐적사로 보내어 국교 재개를 교섭하게 되는데.
국서를 누가 먼저 보내느냐가 국가간 자존심 싸움으로 쟁점이 되자
속을 태우던 대마도주는 국서를 위조하여 국교를 재개시킨다.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처럼 위조 국서를 보내고 조선의 요구사항을 사기로 무마시킨 후
조선의 답서를 마치 처음 보내는 국서처럼 또다시 위조하여 전달한 것이다.
어이 없지만 대마도 사정이 얼마나 절박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일본 본토인은 악착스럽지만 교활하지는 않은데, 대마도인은 악착스럽기는 덜 하나 간사스러운 꾀는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당시의 평가는
대마도인들이 처해있던 상황의 엄혹함을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1635년 이 국서 위조가 밝혀졌는데, 막부는 이를 묵인해주는 대신 감독관을 파견하면서,
양속적 성격이 강했던 대마도는 일본에 편입되어 대조선외교의 창구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조선은 중국의 생사, 비단, 약재 등을 중개하고 인삼 등을 판매하였고
은, 동 등 귀금속과 유황 등을 수입하는 경로로 대마도를 이용했다.
대마도는 면암 최익현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유배된 곳이기도 하고
대마도주에서 화족으로 편입한 소씨 가문의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남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 영유권 주장 및 반환요구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3세기부터 대마도는 왜에 귀속된 것으로 보이며, 한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정식 군현으로 편입된 적은 없다.
철저한 중앙집권제인 조선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땅이라 부를 만한 근거가 약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제주도의 경우를 보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제주는 탐라성주가 별도로 다스리는 반독립지역이었지만,
조선은 개국하자마자 탐라성주 직을 폐지해버리고 제주목사를 파견한 반면
대마도는 방치한 것으로 보아 우리 땅이라는 인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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