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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온의 서고

[시] 자화상: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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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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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1 07:3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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