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전쟁사

명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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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필두로 하는 당대 전례없는 대승을 이룬 해전.

명량해전은 판옥선 13척, 협선 32척으로 200척이 넘는 일본 수군의 위상에 당시 조선수군에게는 불리한 전시 상황이었음에도 

오늘날 전남 해남군 화원 반도 사이에 있는 명량해협에서 전사자는 4명, 부상자는 73명으로 전선의 피해가 거의 없는 전투였다.


명량해전이 있기 전 조선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은 대패하여 조선의 많은 병력과 전선을 잃어버렸다.

제해권을 상실해 버린 조선은 백의종군 중이였던 이순신을 복권시켜 삼도수군통제사에 기용하였다.



그후에 이순신은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수군 재건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때 어란포의 일본 수군 '구루시마 미치후사' 와 '도도 다카토라' 등이 지휘하는 병력이 333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에 일본 측은 간단히 말해 목포측을 흐르는 북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건너 전라도로 서진하여 일본 육군 측과 합류할 계획이였으나, 명량 해협 특정상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의 좁은 수로로 조류는 국내 수로 중에서 가장 빠른 곳이다. 따라서 잔존하는 조선 수군을 격파 후 앞에서 말했듯이 일본 육군에 합류해 한양으로 진격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은 칠천량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의 사기가 높았다.
따라서 일본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이순신 수군을 격파할 것을 결의 했다.

한편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기동 보고를 받고 장병들과 명량해전 직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것을 결의 했다.

그래서 명량해협의 옛 명칭 울돌목으로 접전하여 결전을 벌일 계획이였다.
하지만 일본 수군 탄생이라 말할수 있는 시코쿠 미야쿠보 지역이 명량해협과 비슷한 곳으로 엄청난 조류가 흐르며 물의 속도 또한 명량 못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 수군을 단숨해 제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일본 측에서 조선군을 가볍게 보고 있음을 이용, 일본군을 유인하려고 했다.

음력 9월 7일 벽파진 근처에서 일본 수군의 소함대를 격파했다. 이때 일본은 조선수군이 12척임을 일고 완전히 조선수군을 제거하려고했다.

그런데 조선수군의 12척 전선이 해협으로 들어서 일본 수군을 맞이하였다.
근데 중간에 조선 수군 일부가 적의 기세에 밀려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탑승한 기함은 계속 자리를 고수하며 부하들을 독려했고, 초요기를 올려 뒤로 물러나있던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를 진격해 오도록 한 뒤, 그들을 심하게 다그쳤다. 두 사람의 배가 적진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자 평산포 대장 정응두와 멀리 대략 1킬로미터 정도 물러나 있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도 돌격에 가세했다. 특히, 안위의 군선으로 일본 수군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격전의 와중에 대포와 화살에 맞아 일본군들 일부가 바다에 빠졌는데 이 광경을 보고있던 이순신 기함에 탑승하고 있던 항왜 준사(俊沙)가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다"라고 알렸다.

이순신은 물긷는 병사 김돌손을 시켜 즉시 구루시마를 끌어올릴 것을 명했다. 갈고랑쇠에 낚여 배 위로 끌려 올라온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곧바로 토막내어졌으며, 조선 수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다. 반면에, 전투 중에 지휘관이 적군에 의해 참수되고 토막난 것을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떨어졌다.

일본군에게 또 하나의 악재로, 오후가 되자 점차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조류의 방향이 조선 수군에는 순조(順潮)가 되고, 일본 수군에 역조(逆潮)가 되어, 일본 수군에게 대단히 불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군선이 첨저선이었던 일본 수군은 배가 선회하려면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좁은 해협에 많은 수의 전선을 끌고왔던 일본 수군에게 급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며 전열을 정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포격과 충파를 거듭하였으며, 도도 다카토라 일본수군 총사령관은 부상을 당했다.

하며, 결국에는 333척의 대함대를 고작 12척이 추격하는 꼴이 됐으며 총사령관이 부상을 입은것을 보아 일본 본대도 피해가 있음을 보인다.

나중엔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바람을 이용, 퇴각하였다.

명량해전은 조선군의 대승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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